다람쥐의 "부자" 이야기/[기업 분석]

독일이 낳은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ADIDAS)에 대해

잡지식을 다루는 살찐 다람쥐 2021. 1. 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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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브랜드이자 스포츠에서 나이키(NIKE)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브랜드이다. 필자는 이 브랜드를 포스팅하면서 스포츠 카테고리에 넣을까? 역사 카테고리에 넣을까? 고민하다가 아디다스란 브랜드는 스포츠에서 유명하긴 하지만 스포츠만의 브랜드는 아니며 아디다스의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그릴 것이기에 역사 카테고리에 넣었다. 필자의 최애 브랜드, 아디다스에 대해 알아보고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어떤지에 대해 알아보자!



1900년,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아돌프 다슬러는 독일 바이에른 주 헤르초게나우라흐라는 마을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공장 봉제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는데 이런 환경에서 아돌프는 신발의 가공과 세탁에 대해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아디다스의 창업자, 아돌프 다슬러(아디다스란 명칭이 이 사람 이름에서 따온듯)


그의 부모님은 당시 신발 산업이 하향세이고 먹고 살길이 막막했기에 아들이 제빵사가 되길 원했지만.....



운동선수였던 아돌프 다슬러는 자신이 스스로 튼튼한 운동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 혼자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하며 아디다스 사업의 초석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아돌프는 형인 루돌프 다슬러와 1924년에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위치한 자택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기술자로서 손재주가 있었던 아돌프는 질 좋은 축구화를 만들어냈고 외향적인 성격의 루돌프는 그런 동생이 만든 축구화를 팔기 시작했다.(연구직과 영업직의 형제)



이 둘은 1차대전 이후에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을 설립한다. 그리고 훗날 이 회사는 아디다스의 전신이 되는데....



초창기 다슬러 형제의 회사


처음 다슬러 신발공장은 12명의 사람들이 일하는 가내 수공업 형태였고 두 형제는 서로의 장점을 살려 회사를 운영했다. 특히 아돌프는 자신이 운동선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선수들에게 제품을 제공하기 전에 직접 테스트를 해보고 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가장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철학인데 이것은 지금까지도 아디다스의 대표적인 철학이라고 한다.(역시!!)


아돌프는 더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직접 저울을 들고 원단을 찾아 다녔고 신발의 성능을 테스트한다. 그 결과, 딱딱한 가죽 대신에 가볍고 부드러운 고무 원단으로 운동화를 제작하는데 이것이 아디다스 스포츠화의 효시가 된다.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해 특허권을 갖게 되었고 이 신발들은 트랙과 필드에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해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1932 LA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이 신발을 신고 메달을 따게 되어 인기를 끌게 된다.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800m 달리기 신기록을 세운 리나 라드케 선수의 신발 


그리고 1933년, 다슬러 형제가 나치당에 입당하면서 사업은 더욱 번창한다. 둘의 차이점은 형 루돌프는 나치의 사상에 공감하는 찐 나치당이었지만 아돌프는 그냥 장사하려고 나치당에 가입한 것!



나치 부역 기업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엣는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 대부분이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신었고 독일 올림픽 위원회는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겠다는 선수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다슬러 형제 신발공장에서 스포츠화를 공급받는다.


아돌프는 당시 최고의 육상 스타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운동화를 보여주기 위해 베를린까지 갔고, 제시 오언스는 아돌프의 신발을 신고 100m, 200m, 400m, 멀리뛰기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한다. 이때부터 아돌프 형제의 신발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2차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까지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판매한다.



제시 오언스


하지만 2차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사업여건은 매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는 회사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루돌프는 아돌프의 아내가 경영에 간섭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루돌프는 징집되고 아돌프는 징집되지 않았는데 루돌프는 아돌프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손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져갔다. 


루돌프는 미군에게 잡혀 포로 수용소에 1년 씩이나 감금되기도 하고 탈영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수용소로 가던 도중 SS 친위대 최후의 발악으로 총상될 뻔 하다가 다시 미군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지고 미군에게 체포된다. 이 모든 것을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석방되자마자 아돌프를 나치 협력자로 밀고하지만 아돌프는 유대인계 시장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하게 된다.


그렇게 루돌프는 따로 독립하여 푸마를 설립했고 아돌프는 자신의 이름을 따, 아디다스를 만들게 된다. 이 두 기업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화해를 한다고 한다.



아디다스로 갈라지면서 기술자인 아돌프의 부족한 경영능력을 부인인 케테 다슬러가 보완해주었고 아돌프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멜버른 올림픽에서 수완을 발휘한 이후, 아디다스 프랑스 매니저까지 맡았다. 하지만 야심가인 호르스트는 보수적인 경영을 추구하는 부모님과 잦은 충돌을 빚었고 독일 아디다스 본사와 프랑스 지사가 독립적으로 제품을 개발,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호르스트 다슬러


1949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된 아디다스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서독 대표팀은 결승에 진출하는데 하필 상대가 자신들을 조별리그 2차전에서 3대8로 패배시켰던 세계 최강 헝가리였다. 당시 경기날에 폭우가 발생하여 그라운드가 진흙탕으로 변했는데 이때, 축구화 바닥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는 아디다스의 운동화가 힘을 발휘했고 후반 39분에 독일의 헬무트 란이 결승골을 넣어 독일의 우승에 견인했다. 이는 아디다스 기술의 승리로 극찬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주문이 쇄도해 한 해 45만 켤레 이상 생산된다.


  

1954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서독 대표팀


1960년대부터는 스포츠 의류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고 1980년대까지 스포츠 용품 분야에서 독주를 하게 된다. 하지만 창업자 아돌프 다슬러는 1978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 카데 다슬러 역사 6년 뒤에 세상을 떠나 2세대 경영에 돌입하게 된다.



카데 다슬러


차기 CEO에 오른 다슬러 부부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전 아디다스 프랑스 지사장)는 스포츠 용품 전반으로 사업 범위를 무리하게 확장하여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진 점과 새로운 유행에 둔감한 채, 전문적인 스포츠 용품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인해 혜성처럼 나타난 이 녀석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2020/09/05 - [다람쥐의 '경제' 보따리] - 스포츠의 문화 첨병, 나이키(NIKE)의 승승장구 비결은?


마이클 조던(원래는 아디다스 빠였다고 한다.)을 앞세운 나이키의 마케팅 전략에 아디다스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아디다스는 다슬러 집안의 손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아디다스를 되살리기 위해 전문 경영인 베르나드 타피에가 1990년 새로운 CEO로 오르게 되는데....



희한하게 이 양반은 아디다스를 본업인 스포츠가 아닌 패션 쪽에서 명성을 쌓게 하는데 전설적인 힙합그룹, Run DMC가 아디다스의 파이어버드 저지를 입고 슈퍼스타, 캠퍼스 등의 스니커즈를 신고 활동하며 아디다스는 언더그라운드 문화,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이 된다. Run DMC는 아디다스의 광빠였고 My Adidas 라는 노래도 만들었다. 물론 아디다스는 적극적으로 후원해줬고 이 노래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Run D.M.C.


사업은 점점 번창하여 이후, 패션에 주력하는 Adidas Originals 라인을 생산하여 기존의 아디다스와 독립적인 로고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아디다스 내의 독자적인 브랜드


2010년대에 들어서도 유럽에서는 나이키에 우세했지만 나이키 본진인 미국시장에서는 2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2016년 경에 이 녀석이 설쳐대기 시작하여 아디다스는 북미 3위 브랜드로 고꾸라지고 만다.


언더 아머


위기를 느낀 아디다스는 체질 개선을 위해 새로운 CEO, 카스퍼 로스테드를 영입했고 공장을 독일로 옮겨 전자동화를 실시하여 인건비를 대폭 낮췄다. 또한 브랜드 이미지 재고를 위해 스폰서십을 대폭 손보기도 하였고 셀레브리티와의 스폰서십을 선점하여 애슬레져 시장을 선점하였다.


이에 빠르게 북미 지역 점유율을 회복하여 다시 언더 아머를 제치고 2위에 올라섰다. 현재는 영업이익이 해가 갈수록 증가하여 나이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키는 이미 스포츠 브랜드를 넘어 넷플릭스를 경쟁상대로 삼고 있다고....)



나이키와 아디다스


현재 아디다스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여 오프라인 매장을 줄이고 온라인 매출을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고객의 편의에 아돌프 다슬러의 장인정신을 결합한 새로운 시대의 아디다스. 향후 귀추가 주목되는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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