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한글창제? 백성을 생각한 군주? 측우기 발명? 무수히 많은 업적을 만들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손꼽는 임금하면 무조건 세종대왕을 1순위로 꼽는다.
얼마나 존경받으면 지금도 광화문에 저렇게 떡하니 계시겠는가?
하지만 세종대왕이 신하들에게 악덕 상사의 상징이라면? 현재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직장인이라면 치를 떨만한 직장 상사라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위 이미지를 보고 무엇이 떠오르는가? 학창시절에 세종에 대해 배웠을 때는 밤늦게까지 학문에 몰두하다가 잠이 든 학자에게 용포를 얹혀주는 따뜻한 임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이 밤늦게까지 학문에 몰두하다가 잠이 들때까지 잠을 안자고 업무를 보다가 잠자는 학자들을 지켜보는 직장 상사라고 생각해보자!
자! 이야기 시작하겠다.
세종 제위시절, 무려 18년이나 영의정에 재임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황희 정승이다. 처음 영의정에 오를 나이가 69세였으니 현재 기준으로도 은퇴 연령을 한참 웃돈 고령인 것이다. 그래서 재임한 지 몇달 안되어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그렇게 은퇴를 향한 황희의 눈치게임은 시작되는데....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1435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1449년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하다.
심지어 세종대왕은 나이가 들어 은퇴를 청하는 황희 정승에게 이런 배려를 하기도 했는데...
세종대왕: 출근이 힘들면 내 가마를 타고 오시오! 원한다면 재택근무도 허용하도록 하겠소..(개악마)
그렇게 황희 정승은 18년동안 세종대왕에게 착취당하다가 세종 승하 4개월 전에야 겨우 노예 생활을 탈출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다. 조말생, 김종서, 이징옥 등 여러 신하들도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모두 반려. 심지어 김종서는 6진 개척시, 북방으로 휴가를 갔다는 설도 있다.
사실 노인이 된 중신들을 이렇게 굴려댄 이유는 젊고 유능한 신하들을 집현전에서 신나게 뺑뺑이 시켰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나이 많은 중신들도 힘들어졌다는 설이다.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여 민족의 찬란한 시대를 연 세종대왕. 그 이면에는 왕과 신하들의 노고(뺑뺑이)가 있었음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요즘 시기에 이러면 노동청에 고발조치가...
'다람쥐의 "역사" 한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과연 수공으로 적을 섬멸시켰을까? (1) | 2020.11.02 |
---|---|
융성했던 발해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 (0) | 2020.11.01 |
팔라리스의 황소, 잔인한 고문 도구의 대명사 (0) | 2020.10.30 |
게르마니아, 세계수도를 꿈꾸던 히틀러의 계획 (0) | 2020.10.27 |
경신 대기근, 조선을 괴롭힌 참혹한 재앙 (0) | 2020.10.25 |